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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역사

<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 - 신병주>

by 복온당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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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 내용>

 

1부 조선 개국과 체제 정비의 공간


제1대 태조


1. 한양 도성 건설은 태조 때 그 원형을 갖추었지만 세종 때 32만여 명을 동원해 1422년 공사를 마쳤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 채 되지 못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이 건국되고 3년이 지난 1395년 200년 가까이 조선왕조에서 법궁의 지위를 유지한 경복궁이 들어섰다. 경복궁 건설에는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 건국한 나라인 만큼 왕실이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정신이 반영됐다.


제2대 정종


1. 정종은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정치력을 발휘하기보다는 교외에서 격구나 사냥을 즐기는 한가로운 생활을 했다.
2. 조선 왕과 왕비 무덤인 왕릉은 총 42기가 있는데, 이 가운데 40기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됐다. 2기는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3. 정종은 후궁과의 사이에서 17남 7녀를 두었지만, 정작 정안왕후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쌍릉으로 조성된 왕릉 형식으로만 보면 사후 금슬이 매우 좋은 부부다.

 

제3대 태종


1. 창덕궁 건설 이유는 경복궁이 음양의 형세에 맞지 않고 왕자의 난이 일어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2. 경복궁은 남북으로 이어진 공간이 넓지만 동서 공간의 확보가 어렵고 휴식 공간인 후원이 넓지 못한 점이 창덕궁 건설을 가진 이유로 작용했다.
3. 창덕궁 건설은 태종의 한양 재천도 추진과 더불어 추진된 사업이다.
4.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이 법궁 기능을 하고 창경궁과 경희궁이 이궁 역할을 하였다.


제4대 세종


1. 세종은 1420년 집현전을 본격적인 연구 기관으로 자리 잡게 하고, 이곳을 인재 등용의 산실로 삼았다.
2. 세종은 장영실 같은 천민 출신 과학자를 등용하고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황희를 재상으로 앉힌 것, 음악가 박연, 국방 전문가 김종서와 최윤덕을 양성하고, 유효통, 노중례 같은 의학 전문가를 발탁하였다.
3.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 기구로 삼았다. 이에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최만리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4. 세조 시대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한 성삼문, 박팽년 등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기에 집현전을 반대 세력의 온상이라 판단하고 폐지를 명했다.


제5대 문종


1. 문종은 29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참여했고, 4군 6진 개척 시에는 직접 화차를 발명하기도 했다.
2.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유는 그의 지극한 효심 때문이었다.
3. 계조당은 세종이 앞으로 왕이 될 세자가 미리 정치와 학문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따로 동궁을 만들면서 지은 건물이다.


제6대 단종


1. 단종은 조선 왕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이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성공하면서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고, 단종의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이 되었다.
2. 1457년 상왕 단종이 노산군으로 폐위되면서 정순왕후 역시 부인으로 강봉 되었고, 그해 10월 단종이 역모의 죄로 죽자 정순왕후 역시 관비 신세로 전락하였다.
3. 정순왕후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불교에 크게 의지하였고 궁궐에서 나온 여인들이 자주 찾은 절아 정업원은 그녀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제7대 세조(수양대군)


1. 왕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고 정사를 돌보던 사정전은 세조가 즉위한 지 1년 만에 고문과 비명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2. 사정전은 세종과 세조가 타구를 즐긴 평화로운 모습과 함께, 비정한 군주 세조에게 엄청난 고문을 당한 사육신의 비극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3. 영월 청령포 안에는 지금도 단종의 유배 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600년 된 소나무 관음송이 있다.
4. 숙종 때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의 왕위를 회복하고 사육신을 복권하였다.
5. 세조는 왕권 강화에 주력해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실시했다.
6. 세조는 재위 기간 내내 원인 모를 피부병으로 고생했고 죽음을 맞이한 원인에도 피부병이 있었다.


제8대 예종


1. 예종은 즉위하여 1년 2개월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승하하여 왕으로서 남긴 업적은 그리 많지 않다.
2. 예종 당시 정국은 한명회로 대표되는 원로 훈구파와 구성군으로 대표되는 종친 세력, 그리고 이시애의 난 진압 후 입지가 커진 남이와 같은 신흥 무장 세력 간에 권력 투쟁의 양상이 나타났다.
3. 예종은 남이에게 부담을 느껴 한명회 신숙주의 입장에 동조하고 남이를 제거하였다.


제9대 성종


1. 성종은 대비들을 위한 공간인 창경궁을 조성하여 효를 다하는 왕의 모습을 보였다.
2. 성종은 경연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공부하는 왕의 면모를 보였고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같은 책들의 편찬 사업도 마무리 지었다.
3. 성종은 집현전을 계승해 홍문관을 발전시킨 것처럼 세종의 사가독서 제도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 사가독서를 체계적으로 시행할 별도의 공간으로 독서당을 세웠다.
4. 독서당은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심신의 휴양을 위한 휴가지 기능함과 동시에 오롯이 학문에만 몰두할 수 있는 학업의 장소로도 기능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5. 독서당은 학문 탄압이 심했던 연산군 대에 와서 수난을 당했다.

 

2부 사림의 대두와 양난 극복의 공간


제10대 연산군


1. 연산군은 문종, 단종에 이은 세 번째 적정자 출신 왕이다.
2. 연산군은 즉위 후 경연을 폐지함으로써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3. 연산군은 경복궁에서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공간인 경회루에 기생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며 타락한 군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4. 연산군 대에 궁궐 기녀를 흥청이라 부른 것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용어 흥청망청은 역사의 준엄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5. 후궁 지위에까지 오른 장록수 또한 흥청 출신이었다.
6. 1498년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광기와 폭정을 대변하는 사건이다.


제11대 중종


1.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즉위 초반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반정 과정에서 어떠한 기여도 없이 신하들에게 업혀 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조광조는 중종의 왕의 남자가 되어 성리학의 이상 정치를 실천하는 정치 개혁을 적극 추진했다.
3.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망 후 충격을 받은 제자 양산보는 담양에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뜻의 소쇄원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4. 소쇄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민간 정원이자 조광조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제12대 인종


1. 인종은 조선 왕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다. 재위 9개월 만에 승하했기 때문이다.
2. 인종은 왕으로 있던 시절 성리학을 숭상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파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제13대 명종


1. 명종은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이 20세가 되기 전에는 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관례에 따라 명종 어머니 문정왕후가 정치를 대신하게 됐다.
2. 문정왕후가 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과정에서 외척 정치의 문제점들이 제기되었다.
3. 명종 대는 사화와 외척 정치 횡행, 이어진 흉년 등으로 정국이 혼란한 시기였다.
4. 사림은 지방의 학문적,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 진출을 모색했으나 훈구파의 반격, 즉 사화로 말미암아 150년 가까이 좌절을 맛봐야 했다.
5. 을사사화가 벌어진 후 사화의 끝이 보이는 듯했으나 문정왕후와 윤원형으로 이어지는 외척 정치의 횡행은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권세가들의 정치 독점을 강화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이가 바로 '조식'이었다.
6. 조식은 평상시에도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늘 깨어 있기를 강조했고, 늘 차고 다니던 칼에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고 새기고 경의검이라 명했다.
7. 조식은 산천재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았는데 산천재는 '산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을 본받아 군자가 강건하고 독실하게 스스로를 빛냄으로써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8. 문정왕후가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던 시기에 불교 중흥 정책을 추진하여 봉은사와 회암사를 그 중심 공간으로 삼았다.


제14대 선조


1. 선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교차한다. 사림파를 등용하여 이이, 유성룡, 이산해, 정철,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등 인재를 배출한 공적이 있으나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했다는 비난 역시 피할 수 없다.
2. 학익진 전술로 일본 함대 73척 중 66척이 침몰되고 붙잡혔으나 조선 수군의 군함은 단 1척의 피해도 입지 않은 전투가 바로 <한산대첩>이다.
3. 임진왜란 여파가 수습되기도 전인 1597년 1월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4. 일본에서는 이순신의 지휘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중간첩 요시라'를 이용하여 거짓 정보를 흘렸고, 선조는 이 정보에 속아 출동 명령을 내렸지만, 일본의 계략을 간파한 이순신은 출동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져 그해 이순신은 투옥되었다.
5. 이순신은 유성룡, 이덕형, 이원익 등의 변호로 의금부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백의종군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백의종군은 계급과 권한을 내려놓고 종군한다는 뜻이다.
6.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권율과 원균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권율 또한 원균에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7.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원균마저 전사함으로써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하게 된다.
8. 1597년 해남과 진도를 경계 짓는 울돌목(명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일본 군선 130척과 싸우게 된다. 좁은 해협으로 왜선을 유인하여 한꺼번에 많은 배가 쳐들어올 수 없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조선군의 대승을 이끌었다.
9. 명량대첩의 승리로 일본군의 제해권 장악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고, <정유재란>을 승리로 끝낼 수 있었다.
10. 유성룡은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와 <장비록>을 남겼다.
11. 장비록에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쳐 전개된 왜란의 원인과 경과, 전황, 상황에 대한 반성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모든 것이 이 책 한 권에 담겨있다.
12. 유성룡은 임진왜란 때 좌의정, 병조판서, 영의정 등 중책을 맡으면서도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뜻에서 장비록을 남겼다.
13. 장비록에는 이순신과 신립, 원균, 이원익, 곽재우 등 전란 당시에 활약했던 주요 인물들의 공적과 인물평까지 담겨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14. <옥연정사>는 유성룡이 장비록을 구상하고 집필한 곳이다. 이곳은 유성룡이 만년에 한가로이 학문하기 위해 세우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해 이루지 못하던 것을 승려 탄홍이 그를 위해 10년간 시주를 모아 선물한 우정의 산물이라고 한다.


제15대 광해군


1. 광해군은 연산군과 더불어 반정의 축출된 두 명의 조선 왕 중 한 사람이다.
2  연산군은 검증된 폭군이지만 광해군은 업적도 많은 왕이어서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다.
3. 광해군은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고 이를 완성시켰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친 것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4. 성리학적 윤리의 폐기와 대북 측근 세력 중심의  정국 운영이 큰 반발을 샀고, 무리하게 궁궐을 조성한 것 또한 반대 세력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때 지어진 궁궐이 <인경궁과 경희궁>이다.
5. 흉년으로 인한 정치적 난관과 재정의 고갈에 따른 물자 수급의 어려움 등 수많은 장애 요인을 무시하고 강행된 경희궁 공사는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의 실정을 증명하는 또 다른 요소로 지적되었다.


제16대 인조


1. 1623년 3월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2. 인조와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은 필연적으로 후금의 침입을 초래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1636년 병자호란이라는 더 큰 굴욕을 당했다.
3.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차이는 인조는 중종과 달리 왕이 되기 전 반정 세력과 교감하면서 직접 반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4. 인목대비는 인조에게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청하고 옥새를 전했다.
5. 인조는 경운궁(덕수궁) 즉조당에서 즉위하게 된다.
6. 인조반정은 조선 사회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정치적으로 북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서인들에 의해 성리학 중심주의가 굳혀졌으며, 외교적으로는 친명배금과 대명의리론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7.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공간이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적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며 항전했으나 결국 인조는 항복을 택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8. 1636년의 병자호란은 충분한 준비 없이 명분만 강조하고 목소리만 높이는 강경 외교가 얼마나 큰 우를 범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제17대 효종


1. 효종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호란의 굴욕을 씻고 청에 복수하기 위해 북벌을 국시로 삼았다.
2. 효종 시기는 명나라에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명의리론이 대세를 이룬 시기였다. 그 중심에는 효종의 스승 우암 송시열이 있었고, 송시열과 그 제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명에 대한 의리를 표현했고, 그 흔적들은 화양서원, 만동묘, 대보단 등 수많은 공간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 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귀국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으로 즉위했고, 이 사건은 조선 역사에 큰 전기였다.
4. 성균관 동쪽에 있는 송동은 송시열이 살던 동네라고 기록되어 있고 송시열의 성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5. 대보단 설립 후 숙종은 신종의 제사만 지냈으나 영조 대에 이르러 여기에 명나라 태조와 의종이 추배 되었다. 태조는 원나라에 대항하여, 의종은 청나라에 대항하여 각각 춘추의리를 지키고자 했음을 기리고자 한 것이다. 대명의리론의 구현인 만동묘와 대보단의 설립은 명나라가 중화라면 조선은 소중화라는 소중화 사상, 나아가 중화의 이념은 명나라 멸망 후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조선중화사상으로 이어졌다.


제18대 현종


1. 현종은 재위 기간이 15년이나 되지만 역사에서 존재감이 크진 않다. 이유는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치열한 당쟁으로 인해 왕권이 신권에 밀려 희미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2. 현대인들도 즐겨 찾는 온양온천은 조선시대 왕실의 최고 휴식처였다.
3.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온양온천을 가장 애용했던 왕은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인데 이들 중 세종과 세조, 현종은 모두 안질과 피부병으로 고생한 전력이 있다. 왕의 온천 행차는 휴식보다 병 치료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4. 현종은 자신의 눈병과 피부병에 침과 약이 없자 온천욕을 대안으로 찾고 이곳으로 행차했다. 이때 대규모 인원이 수행했는데 정승과 판서들뿐 아니라 침의와 약의를 비롯한 어의, 무예별감 30명, 어영군 1,200명, 마병 470명과 포수 800명 등 수천의 병사들이 행차에 따라나섰다. 결과적으로 잦은 온천행은 현종이 왕으로 역량을 발휘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고 역사적으로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3부 조선의 중흥과 쇠망의 공간


제19대 숙종


1. 숙종 하면 대부분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궁중 암투를 떠올리게 되지만 숙종은 조선시대 흔치 않은 적정자 출신 왕이자 영조 다음으로 재위 기간 긴 왕이고 업적도 많았다.
2. 세 차례 환국을 통해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조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상평통보를 전국적으로 유통하여 조선 후기 상업을 발달시켰으며, 북한산성 설치와 강화도 지역 방비 시설 확충 등 군사적으로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고,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하여 왕도정치 이념을 바로 세웠다.
3.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인형에 침을 찔러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드라마 장면이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 기록에 기반한 것이다.
4. 장희빈이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곳은 창경궁 취선당으로 현재는 창덕궁 경역 내 낙선재 부근에 있다. 장희빈은 취선당 외에도 창경궁 통명전 등에서 다른 저주 사건을 벌였는데 그 저주가 효험이 있었는지 인현왕후는 1701년에 시름시름 앓다가 승하했다.
5. 장희빈은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주어 후궁으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하지만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들이 강하게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장희빈 아들을 원자로 삼았고 그 후 서인들은 대거 숙청당하고 남인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로 유배된 송시열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이로써 장희빈 아들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6. 하지만 장희빈도 인현왕후가 죽은 같은 해에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가 죄목이 되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7. 숙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도성 방어를 강화했고 이때 한양 도성을 개축하고 새롭게 북한산성을 수축하는 데 매진했다.


제20대 경종


1.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굴레 속에 살면서 즉위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즉위 후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위에 올리려 했던 노론과 함께 국정 운영을 해야 했다.
2. 경종은 조선 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인 30년 동안 세자 생활을 했다.
3. 노론은 경종이 왕에 오른 후에도 왕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며 그를 흔들었다.
4. 소론은 장희빈의 사당 건립을 추진했고 대빈궁이라는 사당 건립으로 이어졌다. 궁이라는 명칭은 경복궁, 창덕궁 등 왕의 활동 공간에 주로 사용되지만, 왕이 되기 전 머물렀던 거처나 후궁들의 사당에도 사용했다.


제21대 영조


1. 조선시대 최장수왕으로 꼽히는 영조는 긴 재위기간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는 탕평책, 균역법, 청계천 준천 사업을 최고 치적으로 자부했다. 또한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을 적극 후원하면서 문화 군주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2.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지만 딸들에게는 매우 자상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딸들마저 먼저 보내는 비운을 겪었다.
3. 인왕제색도로 유명한 진경산수화가 정선의 주요 활동지는 인왕산 일대였다.
4. 35세 첫아들 효창세자를 잃고, 42세 늦은 나이에 겨우 얻은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더없이 귀한 아들이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세자는 성격부터 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커가면서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칼싸움이나 말타기 같은 놀이에만 열중해 학문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영조의 기대를 저버렸다.
5. 사도세자의 비극이 일어난 현장은 창경궁 문정전이었다. 사도세자는 결국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6. 영조는 정비 정성왕후와 계비 정순왕후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해 공주는 없었지만 후궁과의 사이에서 12명의 옹주를 두었다. 그들 가운데 장성한 옹주는 7명이고, 정빈 이 씨와의 사이에서 화순옹주,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귀인 조씨와의 사이에서 화유옹주, 숙의 문씨와는 화령옹주와 화길옹주를 낳았다.
7. 화순옹주는 영조의 장녀로 김한신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가 되는 인물이다.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화순옹주는 큰 슬픔에 빠져 남편 곁을 따라가고자 했다. 영조가 직접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옹주는 뜻을 굽히지 않고 곡기를 끊고 14일 만에 남편을 따라갔다고 전해진다.
8. 영조는 품성이 좋은 화평옹주를 특히 총애했다. 사도세자보다 한 살 많은 친누이로,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는 사도세자를 위로하고 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것을 영조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9. 화평옹주는 22세 어린 나이로 병으로 사망했다. 한중록에서 화평옹주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을 증언하고 있고, 화평옹주가 오래 살았다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도 좋아졌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10. 화평옹주 사망 후 영조의 사랑은 화완옹주에게 향했고, 화완옹주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이 모든 일은 영조의 딸에 대한 무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1. 1776년 영조가 경희궁에서 승하 후 정조는 즉위 보름 만에 화완옹주의 아들 정후겸을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이는 정조의 즉위를 적극 방해했기 때문이다. 화완옹주 또한 서녀로 강등된 후 20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며 70세까지 장수했다. 영조의 딸 중 가장 오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제22대 정조


1.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 군주 정조는 즉위 직후 거처를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과 부속 건물을 설치하고 왕과 함께 개혁 정치를 지원할 인재들을 양성했다. 규장각에서 많은 서책을 출판하고, 도서 수집에 힘을 기울인 것은 학문에 기반한 정책을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2.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적극적인 개혁 정치를 통해 왕권 안정을 기한 후 본격적으로 사도세자 추숭 작업에 착수했다.
3. 정조 시대에는 중인층의 성장이 특히 활발했다.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했던 정조의 파격 인사가 중인층의 신분 상승 욕구를 자극했다.
4. 창경궁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과 관련된 대표적인 건물이 있다. 사도세자가 용꿈을 꾸고 정조를 얻은 경춘전이 그곳이다.
5. 경춘전은 소혜왕후,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 등 조선을 대표하는 왕실 여성들이 거처하고 죽음을 맞이한, 여성들의 공간이었다.
6. 정조는 규장각이 완성된 후 당파와 신분에 구애 없이 능력 있는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남인 정약용을 비롯하여 서얼 출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정조의 뜻을 받들어 연구에 전념했다.
7. 규장각의 주요 업무는 역대 왕들의 글과 책 등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 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8.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했다. 아무리 높은 신하라도 규장각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9. 1794년 정조는 수도권 남쪽 요충지인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1796년 완공을 보았다. 공사 기간은 2년, 투입된 인원은 연 70여만 명, 공사비는 80만 냥에 이르렀다. 정조의 화성 건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는 방편인 동시에 당파 정치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했다.


제23대 순조


1. 11세의 순조는 단종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2. 정조 사후 집권 세력이 된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통해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남인 세력을 축출했다. 그 과정에서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길에 올랐다.
3. 순조 집권 중반기에는 유례없는 기근과 홍경례의 난, 이양선 출몰 등 국내외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4.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기회로 삼아 실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 1805년 강진 보은산에 있는 보은산방에서 기식했고 1808년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학문에 전념했다.
5. 정약용은 유배 생활을 하며 전론, 탕론, 원목 등을 저술하여 혁명적인 토지 정책을 제시하고 유배가 풀린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명저를 담은 여유당전서 500여 권을 저술했다.
6.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생활 중 직접 해양생물을 관찰하고 정리해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자산어보는 각종 수산 동물에 대한 명칭, 분포, 형태, 습성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다.
7.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 정약용에게 조수가 발생하는 까닭은 달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8. 정약용은 유배가 풀려날 수 있을것 같다며 흑산도로가 형을 뵙겠다는 편지를 했지만 정약전은 아우가 위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본인이 우이도에서 기다릴 것이다고 답했다. 그러나 흑산도 사람들이 가지 못하게 붙잡았고 형이 흑산도 백성들에게 큰 신망을 받고 있음을 칭송했다. 1년 후 정약전은 우이도로 거처를 옮겼으나, 동생과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1816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제24대 헌종


1. 헌종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2. 헌종은 1841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왕권 강화에 나섰고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정치 개혁을 이루려 노력했던 헌종의 흔적들은 헌종의 주요 활동 공간이었던 중희당, 승화루 등에 깊이 새겨져 있다.
3. 중희당은 세자와 신료들이 함께 글을 강론하는 공간으로 1782년(정조 6)에 지었다.
4. 헌종 서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특히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해 제주도에 유배된 그에게 글씨를 올려보내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
5. 헌종은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문예 군주였다.


제25대 철종


1. 1849년 6월, 23세의 헌종이 후사 없이 갑작스레 사망하여 순원왕후를 중심으로 후계자 선정이 시작됐고, 선대부터 강화도에 귀양가 있던 '강화도령' 원범이 후계자로 지명됐다.
2. 강화도령 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은 인천 강화읍 용흥궁이다.
3. 선대시대 여러 차례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던 상처 속에도 철종은 강화도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4. 용흥궁에서 오랜 생활 때문인지 철종은 왕이 된 후에도 내내 검소한 생활을 했다.


제26대 고종


1.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고 대비 신정왕후 조씨에게 줄을 댄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승부수가 성공하면서, 12세의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2.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했고 강경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두 차례의 양요로 이어졌다. 이로 1866년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의궤들이 대거 약탈당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3. 1884년 갑신정변은 젊은 급진 개화파 세력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정변은 실패했지만 고종은 서양 공간이 밀집한 경운궁(덕수궁)에 거쳐하면서 근대 신문물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개혁의 의지를 이어갔다.
4.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퇴각을 이끌었다는 점은 흥선대원군에게 큰 자신감을 부여했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오랑캐와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했다. 이로 흥선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개화를 요구하는 세력들에게 큰 반발을 샀고, 결국 1873년(고종 10) 대원군 하야의 원인이 되었다.
5. 조선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청나라는 청불전쟁의 여파 속에도 조선에 적극적으로 병력을 파견했고, 일본은 개화파 지원에서 한발 물러섰다. 한때 왕명조차 무시했던 홍영식, 박영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이들의 권력은 3일 만에 끝이 났고 이로 인해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라는 별칭을 얻었다.
6. 1876년 일본과 조선이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의 개항이 시작되었다.
7. 서양 문물을 접한 고종은 서양 음식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커피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1898년 7월 고종이 먹는 커피에 독을 넣어 시해하려 했던 '김홍륙 독차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8.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커진 일본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친일 세력이 장악한 경복궁에서 탈출하고자 했지만 내부자의 고발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춘생문 사건'이라 한다.
9.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미관파천, 영관파천, 불관파천 등을 시도하여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세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제27대 순종


1. 순종은 일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사건을 핑계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켜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2. 한반도에 주요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가는 청나라, 일본, 러시아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 그 균형에 균열이 갔고 위기감을 느낀 명성왕후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일본은 왕비를 살해하는 만행까지 저지르며 한반도 침탈에 대한 야욕을 분명히 했다.
3. 1905년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압박하고 을사오적(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을 움직여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가 이 늑약의 핵심 내용이었다. 늑약이 체결된 곳이 바로 경운궁 중명전이었다.
4. 191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진 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양극의 길을 마주했다. 우당 이회영 6형제가 벌인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념하는 우당기념관과 친일파의 대표 인물 윤덕영이 세운 벽수산장이 바로 그것이다.
5. 우당 이회영은 대한제국 멸망 직후 일가족 전체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6형제가 전 재산(약 600억 원)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했다.
6. 친일의 길을 택한 윤덕영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조카인 순정효왕후가 치마에 숨긴 옥새를 빼앗아 불법 조약에 날인하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제국으로부터 훈 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친일파로서 승승장구했다. 그 후 일제강점기시절 윤덕영은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을 사들이고, 옛 송석원 터에 벽수산장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이후 사람들은 윤덕영을 조롱하여 벽수산장을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렀다.

 

<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 느낀 점>

역사에 흥미가 없었던 나라서.... 책 읽는 진도 나가는게 쉽지 않았다. 2주 넘게 읽은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 책은 조선 개국의 환희부터 쇠망의 통한까지 조선의 흥망성쇠가 담긴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만약 내가 초중고 학생 시절 이 책을 미리 만났더라면 국사 시험 공부에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지금껏 조선사는 조선왕조실록의 구성을 따라 왕대별, 시대별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 책은 공간을 추가함으로써 시대와 역사를 입체적으로 알려주어 머릿속에 더 쉽게 들어오는 것 같다.

 

<조선 역대 왕들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

제1대 태조

-<한양 도성 건설>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 <경복궁 건설>

제2대 정종

-동생 방원에게 왕위 물려주기 위해 한가로운 생활을 함

제3대 태종

-창덕궁 건설, 한양 재천도 추진

제4대 세종

-<집현전>을 통해 인재 등용

-장영실 같은 천민 과학자 등용

-즉위를 반대하던 황희를 재상에 앉힘

-국방 전문가 김종서, 최윤덕 양성

-음악가 박연 발탁

제5대 문종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참여

-4군 6진 개척 시 화차 발명

제6대 단종

-조선 왕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 단종의 양위를 받는 양식으로 왕이 됨

제7대 세조(수양대군)

-사육신의 비극

-사정전은 세종과 세조가 타구를 즐긴 평화로운 모습과 함께, 비정한 군주 세조에 엄청난 고문을 당한 사육신의 비극이 교차하는 공간

-왕권 강화에 주력해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 실시

제8대 예종

-이시애의 난 발생, 남이 장군이 정벌

-한명회 신수주의 입장에 동조하여 남이 장군을 제거

제9대 성종

-대비들을 위한 공간인 <창경궁> 조성

-경연을 성실히 수행,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같은 책들의 편찬 사업 마무리

-집현전을 계승해 세종의 사가독서 제도 발전적 계승

-사가독서를 체계적으로 시행할 별도의 공간으로 <독서당>을 세움

-<독서당>은 연산군 대에 와서 수난을 당함

제10대 연산군

-문종, 단종에 이은 세 번째 적장자 출신 왕

-경연 폐지함으로써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 차단

-경복궁에서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공간인 경회루에 기생들을 불러 잔치를 열며 타락한 군주의 모습을 보임

-궁궐 기녀를 '흥청'이라고 부른 것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흥청망청'

-후궁 지위에까지 오른 '장록수' 또한 흥청 출신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광기와 폭정을 대변하는 사건

제11대 중종

-중종의 남자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 정치를 실천하는 정치 개혁 추진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사망

제12대 인종

-조선 왕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9개월 만에 승하)

-성리학을 숭상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파의 명예 회복시키는데 중점

제13대 명종

-명종 대는 사회적 외척 정치 횡행, 흉년 등으로 정국이 혼란한 시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윤원형으로 이어지는 외척 정치 횡행

-사림은 지방의 학문적,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 진출 모색하였으나 훈구파의 반격으로 좌절

-이러한 외척정치 및 권세가들의 정치 독점을 문제를 제기한 이가 바로 '조식'

-문정왕후는 수렴청정하던 시기 불교 중흥 정책을 추진하여 <봉은사>와 <화암사> 중심 공간으로 삼음.

제14대 선조

-긍정적인 평가: 사림파를 등용(유성용, 이산해, 정철,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등) 인재 배출

-부정적인 평가: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

-이순신 학익진 전술로 한산대첩 승리

-임진왜란 수습되기 전 <정유재란> 발발

-이중간첩 '요시라'에 속은 선조와 계략을 간파한 이순신. 출격 명령을 거절한 이순신은 그해 투옥됨

-이순신은 유성룡, 이덕형, 이원익 등의 변호로 의금부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백의종군의 길을 나서게 됨.

-<난중일기>를 통해 이순신이 권율과 원균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기록.

-이순신 명량해전의 승리로 <정유재란>을 승리로 끝낼 수 있었음.

-유성룡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와 <장비록>을 작성.

-<장비록>에는 이순신과 신립, 원균, 이원익, 곽재우 등 전란 당시 활약했던 주요 인물들의 공적과 인물들의 평가가 담겨 있어 국보로 지정됨.

제15대 광해군

-연산군과 더불어 반정의 축출된 두 명의 조선 왕 중 한 사람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고 이를 완성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실리 외교로 긍정적 평가

-무리하게 인경궁과 경희궁을 건립하여 재정 고갈

제16대 인조

-인조와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은 후금의 침입을 초래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1636년 병자호란이라는 더 큰 굴욕을 당함

-<인조반정> 조선 사회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 정치적으로 북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서인들에 의해 성리학 중심주의가 굳혀졌으며, 외교적으로는 친명배금과 대명의리론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됨.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를 지켜본 공간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적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며 항전했으나 결국 인조는 항복을 택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

제17대 효종

-효종 시기는 명나라에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명의리론>이 대세

-그 중심에는 효종의 스승인 우암 송시열

제18대 현종

-역사에 존재감이 크지 않음

-예송논쟁으로 치열한 당쟁으로 인해 왕권이 신권에 밀려 있던 시기

-눈병과 피부병 치료를 위해 잦은 온천욕. 

- 이때 대규모 인원이 수행했는데 정승과 판서들뿐 아니라 침의와 약의를 비롯한 어의, 무예별감 30명, 어영군 1,200명, 마병 470명과 포수 800명 등 수천의 병사들이 행차에 따라나섰다. 결과적으로 잦은 온천행은 현종이 왕으로 역량을 발휘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고 역사적으로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제19대 숙종

-영조 다음으로 재위 기간이 길고 업적도 많았음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조정하고 왕권을 강화

-상평통보를 전국적으로 유통하여 조선 후기 상업을 발달 시킴

-북한산성 설치와 강화도 지역 방비 시설 확충 등 군사적 의미 있는 업적을 남김

-단종과 사육신을 복원하여 왕도정치 이념을 바로 세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궁중 암투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들의 장희빈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에 반발

-결국 서인들은 대거 숙청당하고 남인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장희빈 아들이 세자로 책봉.

-장희빈 신당을 차려 인형에 침을 찔러 인현왕후를 저주, 인현왕후가 죽은 후 같은 해 장희빈도 저주가 죄목이 되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

제20대 경종

-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굴레 속에 살면서 즉위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즉위 후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위에 올리려 했던 노론과 함께 국정 운영

-노론과 소론의 싸움

-소론은 장희빈 사당 건립을 추진했고 대빈궁이라는 사당 건립

제21대 영조

-조선시대 최장수왕

-탕평책, 균역법, 청계천 준천 사업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을 적극 후원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 딸들에게는 매우 자상한 면모를 보임

-42세 늦은 나이에 얻은 사도세자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성격부터 마음에 들지 않고, 커가면서 영조의 기대를 저버림

-사도세자의 비극이 일어난 현장은 창경궁 문정전

-화평옹주를 총애했으나 22세 어린 나이로 사망

-한중록에서 화평옹주가 오래 살았다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도 좋아졌을 거라 회고

-화평옹주 사망 후 영조의 사랑은 화완옹주에게 향했고, 화완옹주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함

제22대 정조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 군주

-규장각을 설치하여 당파와 신분에 구애 없이 인재 등용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했던 정조의 파격적 인사로 중인층의 성장이 활발

-남인 정약용, 서얼 출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규장각에서 연구에 전념

-수원 화성을 건설하여 완공

제23대 순조

-정조 사후 집권 세력이 된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통해 천주교 신자가 많던 남인 세력을 축출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

-순조 집권 중반기 유례없는 기근과 홍경례의 난, 이양선 등이 출몰 국내외적인 문제 발생

-정약용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명저를 담은 여유당전서 500여 권 저술

-정약전 흑산도 유배 중 해양생물을 관찰하고 정리한 자산어보를 저술

제24대 헌종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문예 군주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함

제25대 철종

-선대부터 강화도에 귀양

-강원도령 철종은 왕이 되기 전까지 인천 강화읍 용흥궁에서 지냄

-용흥궁에서 오랜 생활 때문인지 왕이 된 후에도 내내 검소한 생활

제26대 고종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승부수로 12세 고종이 왕위에 즉위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 강경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두 차례의 양요 발생(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퇴각을 이끌었다는 점은 흥선대원군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줌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오랑캐와 협상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함

-1876년 일본과 조선이 강화도조약을 체결 후 조선의 개항이 시작

-1884년 갑신정변은 젊은 급진 개화파 세력이 일으킨 정변이었지만 3일 만에 끝나 삼일천하라는 별칭을 얻음

-고종은 커피를 매우 좋아했는데 커피에 독을 타서 시해하려 했던 '김홍륙 독차 사건'이 발생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외세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주적 근대국가로 나아가지 못함

제27대 순종

-고종의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를 핑계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켜 순종은 제2대 황제로 즉위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 명성왕후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고자 함

-일본은 명성왕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한반도 침탈에 대한 야욕을 분명히 함

-1905년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을 움직여 을사늑약을 체결(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진 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양극의 길을 마주함

-우당 이화영 6형제는 전 재산(약 600억 원)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

- 친일의 길을 택한 윤덕영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조카인 순정효왕후가 치마에 숨긴 옥새를 빼앗아 불법 조약에 날인하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제국으로부터 훈 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친일파로서 승승장구, 벽수산장을 지어 사람들에게  '한양의 아방궁'이라 조롱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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